“저…. 『안녕,월경컵』 책 인터넷에 찾아봐도 다 품절이던데, 한 권 살 수 있을까요?”
“아, 저희가 개정판 작업 중인데 아직 완성이 다 되지 않아서요. 좀 기다리셔야 할 것 같아요.”
“혹시 개정판이 언제쯤 나오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음…. 올 하반기쯤에 나올 것 같습니다."
나는 마치 빚 독촉을 받는 사람처럼 옆에서 가슴 졸이며 통화 내용을 듣고 있다가, 태경이 전화를 끊자 삐죽거렸다. “하반기에 나온다고 말하지 말고, 아직은 확실하지 않다고 말하지~. 그러다 하반기에 못 내면 거짓말하는 것 같잖아.” 벌써 책 구매 문의를 받은 게 과장 좀 보태어 100건은 된 것 같다. 아무도 나를 독촉하지 않았지만 똑같은 문의를 여러 차례 받다 보니 괜히 독촉받는 듯한 기분마저 들고 있다.
『안녕,월경컵』은 월경컵을 처음 써보려는 사람들을 위해 만든 책이다. 2018년 10월에 첫 인쇄를 했고, 일 년 후 모든 수량이 팔렸는데 그 이후에 책을 다시 인쇄하지 않았다. 지금이 벌써 2021년이니, 책이 매진된 채로 일 년 반이 되어간다. 월경컵에 입문해보려다 어딘가 막막한 사람들이 책의 존재를 발견하고 사려고 해도 당장 살 수가 없는 상태인 것이다. 이렇게 따로 문의하는 사람들은 주변에 물어볼 데도 없고, 아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전화를 한 것일 테다. 월경컵을 처음 쓰려고 할 때 사람들이 얼마나 막막해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당장이라도 책을 건네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상황이 나도 답답하긴 매한가지다.
처음 만들었던 책을 다시 그대로 인쇄하면 참 좋을 텐데, 그럴 수가 없다. 책을 처음 낸 후로 몇 년 사이 월경컵을 둘러싼 한국의 상황이 빠르게 바뀌었다. 불과 몇 년 전인 2017년에는 한국에서 월경컵을 구매할 수조차 없었다. 한국에서 월경컵을 사고파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월경컵을 써보려면 직접 본 적도 없는 물건을 영어로 된 웹사이트에서 주문해야 했다. 심지어 국내 회사에서 만든 월경컵을 미국 아마존 웹사이트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월경컵이 의약외품으로 허가를 받아 쉽게 월경컵을 살 수 있고 국내에서 만든 제품도 많이 출시되었다. 그러는 동안 책을 쓴 나 자신의 관점도 많이 변했다. 처음엔 나와 내 친구들이 어려워했던 부분을 중점적으로 생각하고 책을 만들었는데, 책을 낸 이후로 몇 년간 월경컵과 관련된 여러 활동을 하며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새로 깨달은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결국 내용을 손봐서 개정판을 내야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개정판을 내야겠다 마음먹은 지 일 년 반이 지난 지금도 아직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 분명 구매 문의를 했던 사람들은 내 책의 존재에 대해서 지금쯤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아갈 텐데, 나는 자꾸만 빚쟁이가 되어 도망 다니고 있는 느낌이 들어 어깨가 움츠러든다.
천지개벽의 순간
“월경컵 만든 사람 진짜 상 줘야 돼! 이 좋은 걸 왜 여태 몰랐나 싶더라니까. 진짜 너도 꼭 한 번 써봐. 한번 쓰면 일회용 생리대 쓰던 시절로 절대 못 돌아가. 생리를 아예 안 하는 거 같다니까? 생리할 때 냄새나고 밑이 간지러운 게 원래 그런 게 아니라 일회용 생리대 잘못이었다니, 진짜 어이없지 않아? 참, 우리가 한 주기 동안 흘리는 월경량이 얼만지 알아? 아니 글쎄 요구르트 한 병 정도밖에 안 된대~ 나는 무슨 우유팩 하나만큼은 흘리는 줄 알았다니까?”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월경컵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당시 월경컵을 처음 써봤는데 너무 편해서 이게 바로 천지개벽하는 거구나 싶을 정도였다. 월경 용품 하나 바꾼 걸로 삶의 질이 이렇게 달라지다니, 이 놀라운 발견을 친구들에게도 알려야만 했다. ‘안전한 거 맞냐, 사람들이 안 쓰는 데는 이유가 있지 않냐’며 친구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몰라서 못 쓰는 거지 한 번 써보기만 한다면 나처럼 좋아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땀이 삐질삐질 나는 무더운 여름, 샤워 후 수건으로 대충 몸의 물기를 닦고서 팬티 한 장 걸치지 않은 채 선풍기 앞에 앉아 몸을 말리는 상쾌함을 월경 중에도 누릴 수 있게 됐을 때, 그 쾌감이란! 꿀럭꿀럭 월경혈이 나오는 신경 쓰이는 느낌을 더 이상 느끼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움이란! 피가 털에 엉겨 굳어가면서 털이 당기는 따가움도, 참을 수 없는 외음부 피부 간지러움도 월경컵을 쓰면서는 자연스레 해결되었다. 한 번 사면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으니 지갑 사정에 도움 되기까지. 물건도 이런 물건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 월경컵이 뭔지조차 모르거나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친구들이 점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직접 시도해보려는 친구들도 생겨났다. 주변에 월경컵을 쓰는 사람이라곤 나밖에 없었던 친구들은 나에게 카톡과 전화로 질문 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나도 처음 월경컵을 쓸 때 그 과정이 쉽진 않았는데, 내가 겪은 어려움은 친구들에 비하면 댈 것도 아니었다. 친구들은 저마다 참 개성 있는 이유로 헤매고 있었다.
친구A : 이거 안 들어가는데? 여기가 질이 맞는지 모르겠어….
친구B : 이거 도대체 어떻게 빼야 해? 네가 똥 싸는 힘 주면 월경컵이 내려온다고 했는데, 나는 되려 올라가. 이러다 응급실 가게 되는 건 아닐까 너무 무서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