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환경 디자인’이라는 말은 성립이 되는 걸까? 환경에 이로우려면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 것이 좋지 않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는데 이상하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 왜냐면 ‘친환경’이라는 단어는 광고 속에만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졌고, 실천해야 할 때가 다가오면 밀린 방학 숙제처럼 매번 ‘다음에’를 외치고 말았기에. 비닐 위 여름의 푸른 녹음 빛으로 인쇄된 친환경 캠페인을 볼 때면 환경 사랑은 먼 훗날 이야기 정도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제 지구는 더 이상 인간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지구 온도를 낮추기 위한 노력이 지구촌 곳곳에서 시행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여파는 어느 날 갑자기, 디자이너인 나에게까지 왔다. 회사에서 고객을 대상으로 ‘친환경 캠페인’을 시행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별안간 내가 캠페인의 디자인 담당이 되어버렸다. 통과되지도 않을 샘플을 잔뜩 만들고, 가제본 명목으로 수십 장의 단면 컬러 프린트를 뽑아대던 사무실의 디자이너는 갑자기 각성해야 했다. 이제 만드는 과정에서 그치지 않고 없어지는 과정까지 생각해야만 했다. 회사에서 진행하는 환경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단순 사회 공헌 수준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하나의 ‘캠페인’으로서 고객에게 알려야만 하는 것이다.
어려운 과제가 눈앞에 떨어졌다. 유통업에 종사하는 디자이너로서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오프라인 유통업의 특성상 소비자들은 공간에 와서 브랜드를 경험한다. 그렇기 때문에 브랜드 이미지를 생생하게 심어주기 위해서는 뭔가를 계속해서 만들어야 한다. 늘 새롭고 눈에 띄게. 더군다나 공간에서 계절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기에 한 계절을 위해 사용된 어떤 조형물, 홍보물은 그 역할을 다 하면 곧바로 폐기되곤 한다(물론 재활용, 재사용하는 것들도 많다). 게다가 기간이 짧은 행사들은 정보가 고객에게 빠르게 전달돼야 하므로 각종 인쇄, 출력물들이 만들어지고 버려지고를 반복한다. 또한, 유통업계는 편리함을 위해 한번 쓰고 버려지는 일회용품과 비닐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사용되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 장바구니, 텀블러 가지고 있지만 깜빡하고 나올 때가 너무 많지 않나. 그럴 때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이 바로 비닐이다. 물론 생분해성 비닐이 시중에 많이 나왔지만, 아직 단가가 너무 비싸고, 대량으로 소비해야 하는 회사에서는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기도 하다.
이렇듯 유통업에 있으면서 단기간 사용되고 버려지는 물건을 피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사용을 다 한 것들은 버려질 때 어디로 가는 걸까? 분리배출은 잘 이루어질까? 무슨 소재로 만들어졌는지도 모를 것들은 제대로 불타거나 분해되지도 않고 영원히 지구를 떠도는 아닌지 걱정된다. ‘친환경’ 디자인을 해야 한다면 이런 장식물을 만들지 않는 게 좋다는 것을 알지만 단번에 변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환경에 영향을 적게 주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나는 당장 실천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환경 보호는 멀고 프로모션은 당장 다음 주부터 시작이다. 지구 온난화보다 뜨겁게 느껴지는 눈앞에 업무를 외면하긴 어렵다. ‘친환경’을 머리와 가슴에 새기고 제작 과정에서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적은 방법들을 찾아보고 실무에 적용하고자 했다. 이미 세계 각국에 많은 디자이너와 회사들이 ‘지속 가능한(sustainable)’ 디자인을 위해 다양한 방법을 연구해왔다. 그 내용 중에 내가 적용한 방법과 앞으로 참고해서 시도해 볼 만한 몇 가지 방법들을 소개해본다.
이 종이는 사탕수수 찌꺼기로 만들어졌다. 그 때문에 나무를 베지 않는다. 폐기 시 땅속에 묻으면 자연 분해돼서 제조부터 처리까지 공해를 최소로 줄여 친환경적이다.
최근 얼스팩이 식품 패키지에 사용된 것을 알게 된 후, 친환경 명절 선물 패키지를 홍보하는 제작물에 이 종이를 사용했다. 종이 자체도 환경에 영향을 적게 미치는 것도 좋았지만 표백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톤의 제지 컬러도 ‘친환경’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다음 명절에 재활용할 수도 있어 폐기율 감소도 기대해본다.
사탕수수 찌꺼기로 만든 종이 '얼스팩'을 이용해 제작한 <그린 패키지> 홍보 POP
사탕수수 찌꺼기로 만든 종이 '얼스팩'을 이용해 제작한 <그린 패키지> 홍보 POP
타이벡은 고밀도 폴리에틸렌으로 만들어졌다. 플라스틱으로 분리배출이 가능하며, 불에 태우면 물과 이산화탄소로 분해되는 소재라 환경 오염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이 특수지는 물에 강하고 인장강도가 높아 튼튼해 오래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타이벡 소개 페이지 참조. tyvekmall.com)
몇 해 전 고객에게 비닐 저사용을 장려하기 위해 회사에서 타이벡을 활용해 장바구니를 제작했었는데, 그때 이 소재를 알게 되었다. 원래는 흰색인 종이에 전면 컬러로 인쇄했는데 발색도 훌륭했으며 무게도 가벼워서 들고 다닐 때 부담스럽지 않았다.
타이벡을 사용해 제작한 현대식품관 타이벡 장바구니 (디자인: 현대백화점 디자인팀 박은하, 변우석)
타이벡을 사용해 제작한 현대식품관 타이벡 장바구니 (디자인: 현대백화점 디자인팀 박은하, 변우석)
위에 소개한 종이 외에도 다양한 컬러와 질감의 비목재 펄프지가 많다.
기회가 있을 때 사용하려고 몇 가지 종이들을 찾아봤다. 만약 종이 종류를 고려할 여유가 있다면 이런 친환경 종이를 먼저 생각해보면 어떨까? (아래 내용은 각 종이 샘플책을 참고하여 작성했다. 코코아, 커피, 플로라: 두성종이 / 리메이크: 삼원특수지)
i. 코코아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코코아 종이는 코코아 껍질 분말을 재사용해 만들었다. 재료의 비율을 조절해 다양한 컬러를 가지고 있는 것도 장점이다.
https://lh5.googleusercontent.com/gJa-mOUNhQKT1NUh8f_E-l0WEl4E1DPOc7Wy3T4AvCFwueB2YP2m9Xo9DyXgrnHru_qT42ivBnfAlzWeCSuWe54XhMFPxKEF5oMRo9YsjoRaaCSMOY6xRSFJ5cDnhq_wD7HRSyH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