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다 샀어야 했을까?

사회에서 디자이너라는 직업으로 첫발을 떼고 큰돈을 버는 데 놀란 것도 잠시, 나는 눈에 띄는 아름다운 물건들을 주저하지 않고 구매하기 시작했다. 2010년에 창간된 『킨포크』가 한국에서 크게 유행했고, 이에 많은 브랜드들이 단순한 상품 판매에서 나아가 상품을 둘러싼 이야기나 생활을 제안하기 시작했다. ‘이 신발에는 장인의 스토리가 담겨있어요, 이 물건을 사면 당신은 휘게 라이프💡를 경험하는 거예요.’ 주체적인 소비를 권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은 마케팅 전략에 불과한 이 문구들에 나는 오랫동안 매력을 느꼈다. 디자이너니까 구매해서 경험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좋은 레퍼런스들은 분명 나에게 도움이 되었지만, 그걸 꼭 다 샀어야 했을까?

<aside> 💡 휘게 라이프: 휘게는 가족, 친구들과 단란하게 모여 있는, 편안하고 기분 좋은 상태를 뜻한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소박한 삶의 여유를 즐기는 라이프스타일을 일컬어 휘게 라이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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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욕 없는 시대로의 입장

2020년 여름 어느 날, 유튜브 채널 ‘하말넘많’을 알게 되었다. ‘하말넘많’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의 줄임말로, 여성을 위한 미디어를 만드는 2인 페미니스트 아트 크루가 운영하는 채널이다. 「인생샷과 마카롱의 상관관계」 편에서 인스타그램이 우리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인생샷을 올리기 위한 필수 조건은 힙한 공간, 의상, 물건이고, 이것들은 결국 과시적 소비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 질문은 내가 평소 습관적으로 쓰던 돈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줬다.

2010년 대의 『킨포크』의 유행은 사실 인스타그램과 함께 찾아왔다. 인스타그램은 SNS(Social Network Service)이지만, 어느새 다양한 브랜드들의 홍보 창구이자 마케팅 분석 1순위 지표가 되었다. 브랜드에서 올리는 감각적인 사진과 스토리텔링, 인플루언서의 근사한 경험은 보는 사람의 소비 욕구를 자극한다. 앞서 이야기했듯, 나는 마케팅 전략에 편승해서 아름다운 물건을 소비해왔다. 그리고 이 과정을 모두 사진으로 남겨서 전시하곤 했다. 돌이켜보니 디자이너라는 이유로 더 적극적으로 이 행위에 참여함으로써 내 감각을 증명하려고 했던 것 같다. 인스타그램은 사용자가 관심 있는 분야에 몰입해서 소비할 수 있도록 정교하게 프로세스가 짜여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라는 개인은 브랜드도 인플루언서도 아니지만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다. 내가 가까운 지인에게 큰 영향을 받듯이 말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 구조다. 내가 찍어 올리는 사진이 불특정 다수에게 영향을 미치고, 이 모든 행위가 과시적 소비를 끌어낸다는 것을 깨닫곤 마음이 불편해졌다. 과시적 소비 전시 콘텐츠의 범람 속에서 개인이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일은 매우 어렵다. 나 또한 인스타그램 콘텐츠 유행에 휩쓸려 오랫동안 과소비를 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깨달음을 통해 자각 없던 소비를 비로소 종결할 수 있었다.

물욕 없는 시대로의 이행

책 『물욕 없는 세계』(스가쓰케 마사노부, 항해, 2017)에서는 과잉 소비를 조장하는 자본주의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인간은 커다란 비극 없이는 진지하게 평화를 구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2020년 우리에게 커다란 비극인 코로나19가 찾아왔고, 자연스럽게 ‘물욕 없는 세계’에 도달했다.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확진자가 발생한 공장이나 직장은 폐쇄되고, 국가들은 국경을 봉쇄하고 지역 간 이동을 제한했다. 급속한 경기침체에 따른 수출 감소로 많은 회사들의 경영 실적이 악화됐다. 회사들은 권고 사직, 희망 퇴직 등 구조조정을 직,간접적으로 표출했고 많은 사람들이 고용 불안을 느꼈다. 고용불안과 미래에 대한 비관적 전망으로 인한 국내 가계 수입 및 소비지출전망의 하락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이러한 불안한 경제 상황에 사람들은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늘렸다. 💡💡

여성 그리고 디자이너는 경제를 잘 모른다는 편견을 비웃듯, 내 주변에서도 저축과 경제 관련 콘텐츠가 활발히 공유되었다. 나 또한 경제 관련 도서를 사서 공부하고 가계부를 쓰기 시작했다. 경제 관련 뉴스레터를 구독하며, 이전처럼 계획 없이 소비하지 않고 사고 싶은 물건이 생기면 오래 고민하게 되었다.

<aside> 💡 고강도의 사회적 거리두기가 진행된 ‘20년 2월부터 5월까지 전체 소매판매액(승용차제외)은 전년 대비 4.7% 감소했으며, 특히 외출과 관련된 의복·화장품 등의 소비는 지난해보다 20% 이상 급락했다. (출처: 통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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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de> 💡 한국은행은 2020년 가계저축률(가계 처분가능소득 등 중 가계 순 저축의 비중)이 1999년 이후 처음으로 10% 내외에 이를 것으로 예측했다. 가계저축률은 1999년 13.2%를 기록한 이후로 10%를 넘은 적이 없다. (출처: 아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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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나는 생산자인걸

이러한 시대적 맥락을 내 직업과 연결해보자면 조금 난처한 상황이다. 내가 만드는 제품은 소비자의 욕망을 건드려서 판매돼야 하는데, 사회적 현상으로 인한 소비 심리 위축이 진입장벽을 높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제품을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다.

“더 나은 제품을 선택함으로써 더 적게 소비하고 더 오래 소유하는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한다”

에릭 옐스마 디트로이트 데님 컴퍼니💡 대표의 이 말은 생산자로서의 나의 태도에 힌트를 주었다.